아름다운 전통과 깊은 영성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 ‘ 성공회(聖公會)’

대한성공회 대전교구

대한성공회 대전교구 홈페이지를 방문하신 모든 영혼 위에 하느님의 크신 은총과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대한성공회는 초대 주교인 고요한 주교(Charles John Corfe)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켄터베리 대주교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은 후 1890년 9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됩니다. 선교 초기에는 서양 문화를 강조하기보다 한국 문화를 존중하여 한옥으로 성당을 설립하여 토착화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당시 한옥으로 지어진 성당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성당은 서울교구 소속의 강화읍성당과 온수리성당, 대전교구 소속의 진천성당과 청주수동성당이 문화재로 남아 있습니다.

대한성공회 대전교구는 1965년 첫 한인 주교인 이천환 주교가 성품 된 후 서울과 대전으로 교구를 분리하여 현재까지 충청도, 전라도, 대전시, 세종시, 강원도 일부 지역 등 대한성공회 3개 교구 중 가장 넓은 지역을 관할하고 있으며, 제8대 교구장인 김호욱 디도 주교를 중심으로 활발한 선교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성공회가 다소 생소한 교단이지만 성공회는 전 세계 160개국 이상이 관구와 교구의 형태로 분포되어 있으며, 로마가톨릭과 정교회를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교단입니다. 또한 성공회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며, 중용(中庸, Via Media)의 신앙을 바탕으로 오늘 날 에큐메니칼 운동에 큰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공회 신앙의 특징은 1888년 람베스 회의에서 결의된 간략하고도 명확한 신앙 기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구약과 신약 66권을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2.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을 통해 신앙을 고백한다.
  3. 세례와 성찬례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로 받아들인다.
  4. 교회의 직제로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주교, 사제, 부제의 세 성직을 받아들인다.

 

이상의 4개 조항에 동의한다면 성공회는 어떤 교파라도 협력의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성공회의 신앙 기준

성공회 신앙의 기준이 되는 교리는 매우 간단합니다.

1888년 전 세계 성공회 주교들이 모인 람베스 회의에서는 성공회 신앙의 기준을 다음 4개 조항으로 정리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구약과 신약 66권을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신앙 고백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을 통해 신앙을 고백한다.

세례와 성찬례

세례와 성찬례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로 받아들인다.

초대교회의 성직

교회의 직제로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주교, 사제, 부제의 세 성직을 받아들인다.

성공회의 신앙 기준

성공회 신앙의 기준이 되는 교리는 매우 간단합니다.

1888년 전 세계 성공회 주교들이 모인 람베스 회의에서는 성공회 신앙의 기준을 다음 4개 조항으로 정리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구약과 신약 66권을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신앙 고백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을 통해 신앙을 고백한다.

세례와 성찬례

세례와 성찬례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로 받아들인다.

초대교회의 성직

교회의 직제로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주교, 사제, 부제의 세 성직을 받아들인다.

감사성찬례

1. 감사성찬례란?

감사성찬례(유카리스트 Eucharist)는 그리스도교 예배의 출발이자 기초요 핵심입니다. 현대의 그리스도교 예배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기도와 전례가 있지만 언제나 그 모든 것들에 기원을 제공하고 핵심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감사성찬례였습니다. 감사성찬례는 “주님의 만찬Lord’s Supper”, “거룩한 공동체 Holy Communion”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천주교(로마 가톨릭)에서는 이것을 ‘미사’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다양한 명칭으로 부르지만 이것은 초대교회부터 그들이 전수받은 유대인 예배생활의 관습을 발전시켜 형성한 그리스도교 예배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예배는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행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은 단지 식사를 하기위함만은 아니었지만 식사를 그들의 모임과 예배에 필수적인 요소로 포함시켰기 때문에 ‘거룩한 식사’가 된 것입니다.

거룩함은 감사성찬례의 중심 성격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신앙을 공동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자신들의 생활을 돌아보고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을 기억하며 성령 하느님과 지금 여기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감사성찬례라는 예배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 감사성찬례의 예배를 통해 하느님과 연결되고 성도들과 연결됩니다. 이것이 거룩함의 본질입니다.

공동체와 나눔은 감사성찬례의 기본적 요소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되 혼자 만나는 것 이외에 사람들과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하심과 함께하심을 확인하는 것이 감사성찬례의 기본요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의 생각과 삶을 나누고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음으로써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그들이 세상에서 건설하려고 하는 하느님 나라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성찬례는 하나의 집회나 예식순서가 아니라 그들이 바라는 하느님의 나라를 그 안에서 발견하고 확신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감사란 바로 이러한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는 각 신자들의 마음 속에 경험된 하느님 나라를 투사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2. 감사성찬례와 신자들의 신앙생활

감사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삶에서 실천하는 것들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감사성찬례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전례행위 leitourgia’라고 하는데 이 말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수행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의무와 같은 것이지만 그것은 ‘예배에 참여하는 의무’라는 식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수행하는 실천 과제나 목표 같은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의 선물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 선물은 그들의 삶에서 선물로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받은 것을 주는 그리스도교 신자생활은 신자가 되기 이전의 삶과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성령의 선물로 받는 갖가지 달란트를 자신의 분수에 맞게 받아 나누어 주는 생활로 전환된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보여주셨던 모범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인들은 섬기는 사람으로서 예배행위에 참여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인의 의무인 것입니다. 이 섬기의 의무를 ‘전례, 레이투르기아’라고 합니다.

 

3. 감사성찬례의 구조와 기능

1) 들음과 찬송

감사성찬레는 다양한 미적 요소로 가득채워져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집단적 신앙과 삶의 표현양식입니다. 예배는 삶의 의례적 요소를 생활화한 것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자극적인 요소만 가지고는 지속성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생활 한가운데서 예배의 위상을 유지하면서 늘 예배로 들어오고 예배에서 파송되어 갈 때 새로움으로 자신의 삶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기능을 위해서 감사성찬례에서 꼭 필요한 것은 들음과 찬송입니다. 우리는 예배에 하느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참여합니다. 하느님 말씀은 성서의 낭독과 설교, 그리고 침묵 가운데 귀를 기울여 집중하므로써 듣게 됩니다. 들음의 기능에 강조점이 있기 때문에 감사성찬례의 행위들은 행위자가 아니라 참석자들에게 봉사하는 의미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서를 낭독할 때 듣는 청중들의 입장에서 행해야 하며, 설교를 하는 것도 청중들이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을 도와주기 위한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침묵의 시간은 들음의 기능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전체 예배는 물흐르듯이 흘러가지만 침묵과 멈춤의 시간은 그 흐름에 힘과 리듬을 주어 활기찬 예배로 만들어 줍니다.

또 감사성찬례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찬송입니다. 찬송은 “비파와 거문고로..” “나팔소리 피리 소리로…” “소고를 치며 춤을 추며” 등 시편의 표현처럼 다양한 악기와 춤으로 표현된 하느님 찬양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노래를 통해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 모든 찬양은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동시에 우리 인간의 실존을 주님께 드리어 구원의 과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존적 울부짖음과 흐느낌, 기쁨과 웃음을 그냥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찬양함으로 정화하여 표현하는 것입니다.

 

2) 나눔

감사성찬례는 성도들의 교제, 성도들의 모임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 예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자기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나눔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 선물로서 물질을 봉헌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담은 물질로는 쌀이나 빵같은 생필품은 물론이요 꽃이나 향기 등 삶을 풍성하게 하는 미적 요소를 고양시키는 물질도 포함됩니다. 또 돈은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수단을 봉헌하는 의미를 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분수에 맞게 하되 우리의 삶에 충분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소유를 나눈다는 것은 감사의 표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삶을 살게 된 것 자체를 나누고 감사하는 표현을 감사성찬례에서 하게 됩니다.

 

3) 섬김

감사성찬례에 참여하는 모든 그리스도교인은 자기 자신의 은혜와 구원 뿐 아니라 이웃들과 만나고 그들이 하느님의 은혜를 받도록 배려하고 안내하는 봉사자입니다. 감사성찬례는 봉사(service)라는 이 사실은 우리가 섬김을 통해 은혜를 받는 최고의 표현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성찬례에서 우리는 섬김의 아름다움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립니다. 참여하는 것도 배려와 섬김이요 찬송하는 것, 성서를 읽고 듣는 것, 집전자의 이끄심에 응답하고 함께 하는 것 모두가 섬김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옆에 있는 동료 그리스도교인을 하느님이 나에게 보낸 천사로서 알고 그를 섬기는 기회를 감사성찬례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4) 친교

감사성찬례에서 모든 그리스도교인은 하느님을 만나고 이웃을 만납니다. 이 만남은 화해의 만남입니다. 이전까지의 왜곡되고 상처입은 관계가 이 만남을 통해 치유됩니다. 관계의 치유란 친교에서 경험되는 가장 감명깊은 차원입니다. 감사성찬례에서 우리는 내 눈에 보이는 이웃들과 친교를 나눔과 동시에 하늘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친교를 나눕니다. 이 친교는 성령의 활동하심 가운데서 누리는 선물입니다. 성령의 파동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들고 우리에게 생기를 주심과 동시에 우리가 다른 사람과 그 생동감으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친교와 우정을 통한 연대가 감사성찬례를 통해 확인됩니다. 그래서 서로 다투거나 싸우는 원수는 감사성찬례를 통해 서로 친구가 되는 길을 발견하게 되고 이 감사성찬례를 통해 둘다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5) 파송

감사성찬례는 그리스도교인들이 머무는 안식처가 아닙니다. 감사성찬례는 인생의 여러 가지 굽이길에서 만나는 오아시스 같은 위치입니다. 이러한 오아시스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지나온 길에서 쌓인 피로를 풀고 그곳에서 더럽혀졌던 몸과 마음을 씻고 쉼을 얻은 다음 새로운 힘으로 다음 여정을 출발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새로운 마음과 기분으로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성찬례에서 이러한 새출발을 파송이라고 합니다. 감사성찬례에서 만난 하느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여정으로 파송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파송의 순간을 중시했던 중세에서 감사성찬례를 ‘미사’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미사는 “가라!(Dismissal/Ite missa est!)”에서 온 말입니다. 감사성찬례의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에 중세 가톨릭은 감서성찬례를 대체하는 별명으로 ‘미사’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파송을 받은 감사성찬례 참여자들은 세상과 자기 자신의 삶으로 파송받은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4. 감사성찬례, 치유와 구원의 힘

감사성찬례는 사람을 치유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곧 구원의 힘입니다. 감사성찬례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되돌아보고 거기에서 받은 상처와 그것으로 인한 왜곡된 삶의 모습을 바로잡는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감사성찬례를 통해 치유받고 우리를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 그리스도 안에 머물도록 하는 여정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감사성찬례는 세례를 통해 변화된 삶의 변화를 일상생활에서 확인하고 그로 인한 은혜를 누리는 순간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감사성찬례에 참여하는 순간 순간들로 이루어진 구원의 여정은 우리를 마지막 구원의 종착역까지 인도하는 이정표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인의 구원의 여정 뿐 아니라 사회적 치유와 구원을 위한 사람들의 연대의 힘 한 가운데 감사성찬례가 존재합니다. 19세기 영국 가난한 사람들에게 투신한 사제들은 감사성찬례 하나만을 믿고 허물어져가는 오두막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드리는 감사성찬례를 통해 사회의 모순으로 인한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이들의 영혼을 구원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사회적 힘을 부여하여 사회적으로 구원을 선포하는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감사성찬례는 그들에게 위안을 줌과 동시에 그들을 사회적 변혁의 한가운데 서도록 힘을 주는 예배입니다. 거리에서 노숙자들과 함께 드리는 감사성찬례의 거룩한 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사람들 한 가운데로 오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례독서

개정된 성공회기도서는 기존에 성서정과를 전례독서라고 바꿔 부르고 있습니다. 본래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한 것입니다. 전례독서는 교회력에 맞춰 읽도록 약속하고 배치된 성경 독서 목록입니다. 즉 같은 본문을 함께 읽도록 한 것입니다.

전례독서는 정해진 절기와 주제에 따라 전례 안에서 성서를 읽는 방법입니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유대교에게까지 올라갑니다.

 

1960년대에 이르러 전례독서는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1983년 북미그리스도교 연합 모임에서 ‘공동전례독서’를 출간하였고, 조금 더 나아가 1992년 ‘개정공동전례독서’(Revised Common Lectionary: RCL)를 내놓았습니다. 대한성공회는 이 ‘공동전례독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물론 나라별로 상황에 따라 축일과 성서가 조금 씩 다르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1. 주일감사성찬례 전례독서

1) 주일 감사성찬례 전례독서는 세계교회가 함께 사용하는 개정 공동전례독서Revise Common Lectionary를 사용합니다.

주일 감사성찬례 전례독서는 가해, 나해, 다해 3년 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림 1주일부터 그 다음해 대림 1주일 전까지가 한 해가 됩니다.

매년마다 복음은 가해-마태오 나해- 마르코 다해-루가 등 달리 읽습니다.

요한복음은 적절한 축일과 기념일에 읽게 됩니다.

본문이 짧은 마르코복음을 읽는 나해에는 중간에 요한복음6장을 읽습니다.

 

2) 전례독서의 새 흐름

최근 전례독서에서 큰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습니다. 결론은 ‘구약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에 드러난 구원의 일관성을 확인하고 구약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 선택 독서 -전통적으로 구약을 복음서의 주제에 따라 배열하는 방법입니다.

당일 복음서에 나오는 주제에 맞는 구약의 말씀을 배치한 것입니다.

: 계속 독서: 구약을 주제별이 아닌 순서대로 배열하여 구약을 계속해서 읽어 나가도록 배치한 독서입니다.

이와같이 공동전례독서에서는 두 가지를 모두 제시하여 설교자가 선택하도록 하였습니다.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도 좋습니다. 계속독서를 한다면 지속성을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선택 독서를 통해 그 날의 주제를 깊이 인식하고, 오후예배나 다른 모임에서 계속독서를 읽는 모임도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가 몰랐던 구약의 세계를 경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주간 감성찬례 전례독서

매일 드리는 주간 감사성찬례 전례독서는 세계교회가 함께 사용하는 주간전례독서 Weekday Eucharistic Lectionary 를 사용합니다.

이 전례독서는 연중절기네는 홀수 해(1)와 짝수 해(2)의 2년 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나머지는 매년 같은 본문을 사용합니다.

성령강림주일과 성삼위일체주일 이후의 주간은 해당되는 기간의 연중 주간 독서를 사용합니다. 주간성찬례 독서는 그날의 축일독서와는 다르므로 축일을 지킨다면, 축일 본기도에 나오는 독서를 사용합니다.

 

3. 성무일과 전례독서

성공회는 매일매일 기도를 드리는 성무일과의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매일 드리는 성무일과 특별히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위한 전례독서는 세계교회가 함께 사용하는 2년 주기의 매일 전례독서 Daily Office Lectionary를 사용합니다.

이 전례독서는 홀수 해와 짝수 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단, 대림1주일이 시작되는 해로부터 다름 해의 독서를 읽게 됩니다.

매일의 성서는 1독서 구약, 2독서 서신, 그리고 복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도 중 2독서까지 읽는다면 복음을 포함해서 읽습니다.

만일 성무일과를 성찬례와 함께 드린다면 1독서까지만 읽고 성찬례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성찬례 말씀의 전례를 성무일과로 대신한다면 2독서는 언제나 복음을 읽게됩니다.

성무일과의 독서를 주간 감사성찬례 독서로 대체하여 사용할 수도 있도록 하였습니다. 성령강림주일과 삼위일체주일의 주간은 해당되는 기간의 연중주간 독서를 사용합니다다. 성무일과 독서는 그날의 축일독서와는 다르므로 축일을 지킨다면, 축일 본기도에 나오는 독서를 사용하게 됩니다.

성무일과와 영적 생활

구약시대부터 사람들은 정해진 기도문으로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쉐마 이스라엘’로 시작하는 기도문을 바쳤습니다(신명 6:4~5). 예수님도 당신 제자들에게 직접 기도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마태 6:9~13).

구약성서에서 다니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불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낙심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 기도를 바치면서 하느님께 감사하였습니다(다니 6:10). 신약성서에서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도 오후 3시,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서 성전으로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사도 3:1). 이렇게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하느님과 만나는 습관이 되어 있던 신앙의 선조들에게 하느님은 풍성한 축복을 베풀어 주시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당신 나라의 도구로 기쁘게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영국성공회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의 전례개혁을 통하여 중세시대 하루에 일곱 차례 드려지던 수도원적 기도의 리듬이 둘로 축소되었습니다(조도와 만도). 공동기도서가 신자들의 손에 들려지게 됩니다. 이때부터 성직자와 수도자들만의 전유물이던 성무일과를 평신도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상 어느 교파도 이룩해놓지 못한 위대한 영성적 업적입니다. 이것은 평신도들도 삶의 현장에서 생활 수도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성공회 교회와 가정은 바로 세상 속에서 신앙과 삶을 통합해내는 생활 수도원이 되는 것입니다.

공동기도서는 다만 예식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무일과 안에서 인간의 모든 삶들이 자연스럽게 종교 안으로 통합되는 기도로 올려지게 됩니다. 성무일과는 매일의 생활을 위한 영성을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매일의 필요(기우, 풍작, 평화)를 커버하는 기도와 감사 기도들이 들어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날마다 반복되는 삶을 기도를 통하여 성화시켜 나아갑니다. 성무일과의 영성 안에서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신념체계로서만 아닌 삶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성공회 영성가인 마틴 쏜튼 신부(Martin Thornton : 1915 – 1986)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17세기의 평신도에게 있어서 공동기도서는 책장에서 꺼내어 성당으로 가지고 들어가 조심스럽게 올려놓는 하나의 빛나는 책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소중한 개인 지참물로 교회에서 부엌으로, 거실로, 또는 침대 옆의 테이블로 가져가는 영성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귀중한 지침서였습니다.”

이렇듯 정해진 기도서를 가지고 정해진 시간에 드림으로 정해진 시간을 성화시키는 기도를 가리켜 교회에서는 ‘성무일과(divine office)’라고 부릅니다. 성무일과(聖務日課)는 글자 그래도 하루의 어느 활동보다 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매 시간을 성화하는 기도

성무일과는 ‘하느님의 일(Opus Dei)의 영성’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시간의 전례(Liturgy of the Hours)’라고도 불리는 이 기도는 그리스도의 기도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드리는 성무일과 시간에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무일도 안에 있는 기도문을 한구절씩 바칠 때마다 거기서 고동치는 ‘그리스도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말씀으로 이루어진 기도

성무일과 안에서 듣고 선포되는 것은 영감받은 성경구절인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성무일과의 핵심을 구성하는 시편, 송가 및 독서들입니다. 성무일과를 바치면서 시편기자가 부르듯(시편 116편) ‘찬미의 제물’을 바칩니다. 이것은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찬미와 연합하여 성부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성무일과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그 기도로 우리를 지으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날마다 바치는 성무일과를 통하여 우리의 여정은 격려를 얻고, 항상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신비로 마음을 드높이게 됩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드리는 전례적 기도

날마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하여 자신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때로 우리의 기도생활은 하느님 중심적이기보다는 보다 자아중심적인 쪽으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무일과 안에는 전례가 있습니다. 전례는 우리의 기도가 개인주의화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교회와 세상과 이웃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한 폭넓은 기도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주 강한 기도가 성무일과입니다. 성무일과는 우리 기도생활에 새롭고 깊은 차원을 덧붙여줍니다.

성무일과는 우리가 언제든지 어디서나 기도의 공동체를 느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됩니다. 아울러 성무일과는 교회일치적인 본질도 가지고 있습니다. 날마다 매순간 전세계를 통하여 보편교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성무일과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이유

성무일과에 포함된 기도의 언어를 통해 깊은 침묵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을 통하여 우리의 영성은 깊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성무일과가 주는 축복을 공부합니다.

첫째, 성무일과는 우리에게 영적인 유익을 줍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도의 언어 안으로 들어가도록 도와줍니다. 실제로 유대교 신앙에서도 일과의 핵심은 시편이었습니다. 그 맥을 이은 그리스도교 또한 송가, 성시, 대경 및 다른 성무일과가 지닌 우아한 언어들을 사용함으로 우리의 기도생활은 깊어지는 것입니다. 지난 수세기동안 교회는 이 의미 깊은 기도를 사용하여왔습니다.

둘째, 성무일과는 우리를 보다 더 큰 그리스도의 몸과 전통으로 연결시켜줍니다. 성경, 성시, 찬가, 송가 및 하느님께 올라가는 다른 기도들과 결합되면서 같은 기도를 바치는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우리가 일치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지난 교회사를 통하여 같은 기도를 드렸던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과 우리를 연결시켜줍니다. ‘은혜로운 빛이여 Phos Hilaron’나 ‘당신은 하느님 Te Deum’과 같은 몇 가지 기도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성모마리아 송가 Magnificat’나 ‘찬양송가Benedictus’ 는 성서 안에서 발견되는 기도들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시편을 기도할 때, 우리는 예수님 자신이 기도하셨던 바로 그 동일한 기도들을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무일과는 전 세계와 모든 세대를 걸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비하신 몸과 연결시키게 됩니다.

셋째, 성무일과는 ‘하느님의 현존’을 익히도록 잘 돌보아줍니다. 성무일과는 하느님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삶 가운데 계신 그분을 더 잘 깨닫게 되고, 그 안에서 안식을 취하며, 그분께 더 열려있도록 하는 신앙훈련입니다. 성무일과를 통하여 우리는 더 잘 깨어서 기도하게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매순간을 더 잘 살아가게 됩니다. 성무일과는 언어에 뿌리를 박고 있으므로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을 가지고 하느님의 신비에 더 잘 머물도록 해줍니다. 성무일과를 드리는 동안 우리는 말씀과 침묵 안에서 하느님과 만나는 공간을 창조하게 됩니다. 하루 종일 그러한 분위기가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게 됩니다.

성무일과는 우리의 영적생활의 기본적인 뼈대가 됩니다. 이를 통하여 성찬례가 바로 세워지고, 다양한 영성생활의 통로(렉시오 디비나, 관상기도, 향심기도, 묵주기도, 레버린스 등)도 기름지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성무일과는 성찬례의 은총을 더 풍성히 받도록 도와줍니다. 성공회의 기도 생활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하느님 백성들의 은총을 받는 두가지 통로는 성무일과과 성찬례입니다.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이루어진 성서정과표에 따른 성무일과를 통해 하느님 말씀을 규칙적으로 묵상하는 훈련을 받은 신자는 성찬례를 더 잘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왜 성무일과가 우리 평신도들의 삶 안에서도 필요한가에 대한 이유가 됩니다. 성무일과를 배우고 기도하려는 초보적인 발걸음만으로도 엄청난 보답을 받을 것입니다. 하루에 하나 또는 두 가지의 송가나 성시를 기도하더라도 우리의 영성은 진정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성공회 성무일과 : 전례기도와 자유기도의 조화

물론 자유스런 대화기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더 친숙해지기위해서는 때론 침묵기도, 기도문으로 드리는 기도 및 자유기도도 모두 필요합니다. 이 모든 기도들은 영적 생활에서 균형을 이루고 바쳐져야 합니다.

때론 우리의 기도생활에 필요한 적절한 말들이 바닥날 때가 있습니다. 뭔가 지루하고, 영감이 떨어지거나 또는 진부한 말들에 계속 머물고 싶어 할 때도 있습니다. 이 때 우리가 규칙적인 성무일과의 기도로 돌아오게 되면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만든 영감 넘치는 기도로부터 영적인 자양분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날마다 규칙적으로 균형 잡힌 기도생활을 훈련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심리적 및 보건과 관련된 사안에 대하여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무일과로 기도를 드릴 때에 교회와 세상을 위해서도 풍성한 대도를 드리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의 폭은 성무일과를 통해 더 넓어집니다. 성무일과는 전례기도이면서도 그 안에는 자유롭게 대도를 바칠 수 있는 공간도 있습니다(예 : “●주여, 우리 기도를 들으시오며, ○ 우리 부르짖음이 주께 사무치게 하소서.”). 이 공간을 잘 활용하면 전례기도와 자유기도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면서 우리의 기도생활이 날마다 메마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무일과를 효과적으로 드리는 방법

첫째,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 바치도록 노력하십시오. 성전에서 바치어도 좋고 여의치 못할 때에는 지금 처한 상황 속에서 바치십시오(정식으로 성무일과를 바치기 힘든 상황이라면 소성무일과를 품에 소지하고 있다가 짧게 바쳐도 좋습니다). 만약 정해진 성무일과 시간을 놓치었다면 그때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기억합니다. 또한 저녁 기도 시간을 놓치었다면 굳이 저녁기도를 다시 바치지 마시고 끝기도를 바치면 됩니다. 그리고 하루 일을 정리하고 취침하시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해진 시간에 하느님을 기억하는 내적인 자세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성실성을 귀하게 보십니다.

 

둘째, 되도록 천천히 소리내어 바치십시오. 렉시오 디비나(성독)의 기본 원리도 소리내어 성서와 영적 독서를 통해 자양분을 얻듯이, 성무일과 또한 혼자 바칠 때에도 소리내어 바치면 그냥 눈으로 읽어서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은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셋째, 머리로 분석하지 말고 기도문, 시편, 성서의 말씀들에 마음을 실어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우리는 그럴 때에 성무일과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통하여 고동치는 그리스도의 심장 박동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성서를 읽은 다음에는 잠시 침묵하시면서 묵상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본문 말씀을 통하여 나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인지, 또 내가 바꾸기를 바라는 생각이나 생활습관은 무엇인지 순종하는 마음으로 묵상하시면서 세미하게 들려오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다섯째, 대도시간에는 평소에 기도하고 싶은 제목을 정해놓고 바치십시오. 교회와 국가, 세상, 고통받는 이들, 성직자, 교우들, 가족이나 친지들을 위하여 기도를 바칩니다.

 

여섯째, 가능하다면 저녁기도 시간에는 찬트를 사용하면 좋습니다. ‘은혜로운 빛이여’나 ‘성모송가’ 또는 ‘성 시메온 송가’ 정도는 노래로 부른다면 성무일과를 통해 받는 은총이 더 풍성해집니다.

 

맺는말

우리가 주의 기도를 비롯한 성무일과의 여러 기도문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욀 때 그 단어들은 우리의 가슴 속에 스며듭니다. 그 말들은 우리의 영혼을 빚어갑니다. 우리 내면의 의향을 담아서 아름다운 기도의 향기로 되어 다시금 하느님 옥좌까지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우리 성공회 전통 안에서 공동기도서뿐만 아니라 각 수도회와 신심단체에 따라 고유 기도서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도 기본적인 형식과 규칙이 있어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규칙적인 성무일과는 우리의 이기적인 생각과 사고 패턴을 정화시켜 줍니다. 그래서 신앙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사람으로 향기를 풍기도록 만들어줍니다.

교회력(Church Year)

세상의 달력과 달리 교회에서 지키는 새해는 대림기간부터이다. 이를 교회력 혹은 전례력(Liturgical Year)이라 부른다.

교회력은 부활과 성탄의 두 축일을 기준으로 설정된다. 그러므로 해마다 바뀌는 이동절기인 부활주일을 기준으로 사순절기와 부활절기가 설정되고, 12월 25일로 고정된 성탄일을 기준으로 대림절기와 성탄절기, 공현 후 연중시기가 설정된다. 부활주일은 매년 춘분 후, 음력 보름을 지나 맞게 되는 첫 주일이 된다. 그러므로 어느 해에나 3월 22일 이후에서 4월 25일 이전에 부활주일이 오게 되어 있다.

절기마다 상징하는 색깔도 다양하다.

  1. 대림절기(자색): 성탄일 전 네 번째 주일을 대림 1주일로 지키어 교회력의 첫 날로 삼아 성탄일 전까지 4주간을 지킨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며 엄숙함과 희망이 교차하는 기간이다.
  2. 성탄절기(백색): 성탄일을 기준으로 1월 6일 공현일 후에 오는 첫 주일(연중 1주)전까지를 지킨다. 성탄의 기쁨과 영광이 지속되는 기간이다.
  3. 사순절기(자색): 부활주일을 기준으로 주일을 제외한 평일 40일 전 수요일부터 시작되며 그 첫날을 재의 수요일로 지키고 부활주일 전 한 주간을 성주간(이때는 홍색)으로 지킨다.
    참회와 근신으로 모든 교우들은 극기와 회개의 기도를 바치는 기간이다.
  4. 부활절기(백색): 부활주일부터 성령강림주일까지의 기간이 되며, 부활주일 후 40일째 되는 목요일은 주님의 승천일로 지킨다.
  5. 연중절기(녹색): 공현일 후 첫 주일(주의 세례)부터 재의 수요일 전일까지와 성령강림주일(홍색) 다음부터 대림주일 전까지가 해당된다. 따라서 공현 후 연중주일은 “주의 세례”주일로 시작해서 재의 수요일 전 까지 6~9주간이 되고 성령강림 후 연중주일은 삼위일체 주일로 시작해서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로 마친다. 최근에는 삼위일체주일 후 첫 주일부터 성삼위일체 후 1주일부터 함께 병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활동을 묵상하며 생명과 삶의 역동성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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