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무일과

성무일과와 영적 생활

 

구약시대부터 사람들은 정해진 기도문으로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쉐마 이스라엘’로 시작하는 기도문을 바쳤습니다(신명 6:4~5). 예수님도 당신 제자들에게 직접 기도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마태 6:9~13).

구약성서에서 다니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불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낙심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 기도를 바치면서 하느님께 감사하였습니다(다니 6:10). 신약성서에서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도 오후 3시,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서 성전으로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사도 3:1). 이렇게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하느님과 만나는 습관이 되어 있던 신앙의 선조들에게 하느님은 풍성한 축복을 베풀어 주시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당신 나라의 도구로 기쁘게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영국성공회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의 전례개혁을 통하여 중세시대 하루에 일곱 차례 드려지던 수도원적 기도의 리듬이 둘로 축소되었습니다(조도와 만도). 공동기도서가 신자들의 손에 들려지게 됩니다. 이때부터 성직자와 수도자들만의 전유물이던 성무일과를 평신도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상 어느 교파도 이룩해놓지 못한 위대한 영성적 업적입니다. 이것은 평신도들도 삶의 현장에서 생활 수도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성공회 교회와 가정은 바로 세상 속에서 신앙과 삶을 통합해내는 생활 수도원이 되는 것입니다.

공동기도서는 다만 예식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무일과 안에서 인간의 모든 삶들이 자연스럽게 종교 안으로 통합되는 기도로 올려지게 됩니다. 성무일과는 매일의 생활을 위한 영성을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매일의 필요(기우, 풍작, 평화)를 커버하는 기도와 감사 기도들이 들어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날마다 반복되는 삶을 기도를 통하여 성화시켜 나아갑니다. 성무일과의 영성 안에서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신념체계로서만 아닌 삶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성공회 영성가인 마틴 쏜튼 신부(Martin Thornton : 1915 – 1986)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17세기의 평신도에게 있어서 공동기도서는 책장에서 꺼내어 성당으로 가지고 들어가 조심스럽게 올려놓는 하나의 빛나는 책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소중한 개인 지참물로 교회에서 부엌으로, 거실로, 또는 침대 옆의 테이블로 가져가는 영성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귀중한 지침서였습니다.”

이렇듯 정해진 기도서를 가지고 정해진 시간에 드림으로 정해진 시간을 성화시키는 기도를 가리켜 교회에서는 ‘성무일과(divine office)’라고 부릅니다. 성무일과(聖務日課)는 글자 그래도 하루의 어느 활동보다 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매 시간을 성화하는 기도

성무일과는 ‘하느님의 일(Opus Dei)의 영성’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시간의 전례(Liturgy of the Hours)’라고도 불리는 이 기도는 그리스도의 기도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드리는 성무일과 시간에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무일도 안에 있는 기도문을 한구절씩 바칠 때마다 거기서 고동치는 ‘그리스도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말씀으로 이루어진 기도

성무일과 안에서 듣고 선포되는 것은 영감받은 성경구절인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성무일과의 핵심을 구성하는 시편, 송가 및 독서들입니다. 성무일과를 바치면서 시편기자가 부르듯(시편 116편) ‘찬미의 제물’을 바칩니다. 이것은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찬미와 연합하여 성부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성무일과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그 기도로 우리를 지으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날마다 바치는 성무일과를 통하여 우리의 여정은 격려를 얻고, 항상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신비로 마음을 드높이게 됩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드리는 전례적 기도

날마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하여 자신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때로 우리의 기도생활은 하느님 중심적이기보다는 보다 자아중심적인 쪽으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무일과 안에는 전례가 있습니다. 전례는 우리의 기도가 개인주의화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교회와 세상과 이웃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한 폭넓은 기도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주 강한 기도가 성무일과입니다. 성무일과는 우리 기도생활에 새롭고 깊은 차원을 덧붙여줍니다.

성무일과는 우리가 언제든지 어디서나 기도의 공동체를 느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됩니다. 아울러 성무일과는 교회일치적인 본질도 가지고 있습니다. 날마다 매순간 전세계를 통하여 보편교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성무일과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이유

성무일과에 포함된 기도의 언어를 통해 깊은 침묵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을 통하여 우리의 영성은 깊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성무일과가 주는 축복을 공부합니다.

첫째, 성무일과는 우리에게 영적인 유익을 줍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도의 언어 안으로 들어가도록 도와줍니다. 실제로 유대교 신앙에서도 일과의 핵심은 시편이었습니다. 그 맥을 이은 그리스도교 또한 송가, 성시, 대경 및 다른 성무일과가 지닌 우아한 언어들을 사용함으로 우리의 기도생활은 깊어지는 것입니다. 지난 수세기동안 교회는 이 의미 깊은 기도를 사용하여왔습니다.

둘째, 성무일과는 우리를 보다 더 큰 그리스도의 몸과 전통으로 연결시켜줍니다. 성경, 성시, 찬가, 송가 및 하느님께 올라가는 다른 기도들과 결합되면서 같은 기도를 바치는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우리가 일치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지난 교회사를 통하여 같은 기도를 드렸던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과 우리를 연결시켜줍니다. ‘은혜로운 빛이여 Phos Hilaron’나 ‘당신은 하느님 Te Deum’과 같은 몇 가지 기도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성모마리아 송가 Magnificat’나 ‘찬양송가Benedictus’ 는 성서 안에서 발견되는 기도들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시편을 기도할 때, 우리는 예수님 자신이 기도하셨던 바로 그 동일한 기도들을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무일과는 전 세계와 모든 세대를 걸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비하신 몸과 연결시키게 됩니다.

셋째, 성무일과는 ‘하느님의 현존’을 익히도록 잘 돌보아줍니다. 성무일과는 하느님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삶 가운데 계신 그분을 더 잘 깨닫게 되고, 그 안에서 안식을 취하며, 그분께 더 열려있도록 하는 신앙훈련입니다. 성무일과를 통하여 우리는 더 잘 깨어서 기도하게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매순간을 더 잘 살아가게 됩니다. 성무일과는 언어에 뿌리를 박고 있으므로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을 가지고 하느님의 신비에 더 잘 머물도록 해줍니다. 성무일과를 드리는 동안 우리는 말씀과 침묵 안에서 하느님과 만나는 공간을 창조하게 됩니다. 하루 종일 그러한 분위기가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게 됩니다.

성무일과는 우리의 영적생활의 기본적인 뼈대가 됩니다. 이를 통하여 성찬례가 바로 세워지고, 다양한 영성생활의 통로(렉시오 디비나, 관상기도, 향심기도, 묵주기도, 레버린스 등)도 기름지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성무일과는 성찬례의 은총을 더 풍성히 받도록 도와줍니다. 성공회의 기도 생활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하느님 백성들의 은총을 받는 두가지 통로는 성무일과과 성찬례입니다.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이루어진 성서정과표에 따른 성무일과를 통해 하느님 말씀을 규칙적으로 묵상하는 훈련을 받은 신자는 성찬례를 더 잘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왜 성무일과가 우리 평신도들의 삶 안에서도 필요한가에 대한 이유가 됩니다. 성무일과를 배우고 기도하려는 초보적인 발걸음만으로도 엄청난 보답을 받을 것입니다. 하루에 하나 또는 두 가지의 송가나 성시를 기도하더라도 우리의 영성은 진정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성공회 성무일과 : 전례기도와 자유기도의 조화

물론 자유스런 대화기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더 친숙해지기위해서는 때론 침묵기도, 기도문으로 드리는 기도 및 자유기도도 모두 필요합니다. 이 모든 기도들은 영적 생활에서 균형을 이루고 바쳐져야 합니다.

때론 우리의 기도생활에 필요한 적절한 말들이 바닥날 때가 있습니다. 뭔가 지루하고, 영감이 떨어지거나 또는 진부한 말들에 계속 머물고 싶어 할 때도 있습니다. 이 때 우리가 규칙적인 성무일과의 기도로 돌아오게 되면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만든 영감 넘치는 기도로부터 영적인 자양분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날마다 규칙적으로 균형 잡힌 기도생활을 훈련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심리적 및 보건과 관련된 사안에 대하여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무일과로 기도를 드릴 때에 교회와 세상을 위해서도 풍성한 대도를 드리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의 폭은 성무일과를 통해 더 넓어집니다. 성무일과는 전례기도이면서도 그 안에는 자유롭게 대도를 바칠 수 있는 공간도 있습니다(예 : “●주여, 우리 기도를 들으시오며, ○ 우리 부르짖음이 주께 사무치게 하소서.”). 이 공간을 잘 활용하면 전례기도와 자유기도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면서 우리의 기도생활이 날마다 메마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무일과를 효과적으로 드리는 방법

첫째,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 바치도록 노력하십시오. 성전에서 바치어도 좋고 여의치 못할 때에는 지금 처한 상황 속에서 바치십시오(정식으로 성무일과를 바치기 힘든 상황이라면 소성무일과를 품에 소지하고 있다가 짧게 바쳐도 좋습니다). 만약 정해진 성무일과 시간을 놓치었다면 그때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기억합니다. 또한 저녁 기도 시간을 놓치었다면 굳이 저녁기도를 다시 바치지 마시고 끝기도를 바치면 됩니다. 그리고 하루 일을 정리하고 취침하시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해진 시간에 하느님을 기억하는 내적인 자세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성실성을 귀하게 보십니다.

 

둘째, 되도록 천천히 소리내어 바치십시오. 렉시오 디비나(성독)의 기본 원리도 소리내어 성서와 영적 독서를 통해 자양분을 얻듯이, 성무일과 또한 혼자 바칠 때에도 소리내어 바치면 그냥 눈으로 읽어서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은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셋째, 머리로 분석하지 말고 기도문, 시편, 성서의 말씀들에 마음을 실어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우리는 그럴 때에 성무일과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통하여 고동치는 그리스도의 심장 박동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성서를 읽은 다음에는 잠시 침묵하시면서 묵상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본문 말씀을 통하여 나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인지, 또 내가 바꾸기를 바라는 생각이나 생활습관은 무엇인지 순종하는 마음으로 묵상하시면서 세미하게 들려오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다섯째, 대도시간에는 평소에 기도하고 싶은 제목을 정해놓고 바치십시오. 교회와 국가, 세상, 고통받는 이들, 성직자, 교우들, 가족이나 친지들을 위하여 기도를 바칩니다.

 

여섯째, 가능하다면 저녁기도 시간에는 찬트를 사용하면 좋습니다. ‘은혜로운 빛이여’나 ‘성모송가’ 또는 ‘성 시메온 송가’ 정도는 노래로 부른다면 성무일과를 통해 받는 은총이 더 풍성해집니다.

 

맺는말

우리가 주의 기도를 비롯한 성무일과의 여러 기도문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욀 때 그 단어들은 우리의 가슴 속에 스며듭니다. 그 말들은 우리의 영혼을 빚어갑니다. 우리 내면의 의향을 담아서 아름다운 기도의 향기로 되어 다시금 하느님 옥좌까지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우리 성공회 전통 안에서 공동기도서뿐만 아니라 각 수도회와 신심단체에 따라 고유 기도서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도 기본적인 형식과 규칙이 있어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규칙적인 성무일과는 우리의 이기적인 생각과 사고 패턴을 정화시켜 줍니다. 그래서 신앙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사람으로 향기를 풍기도록 만들어줍니다.